재미있는 한국사 - 광해군 (光海君) 유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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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한국사 - 광해군 (光海君) 유배지

by 생각도령 2020. 12. 27.

이시방 제주목사는 조정의 처분을 기다려 시체를 운구하려면 형색이 변하여 취증할 수 없으므로 숭종의 예를 올릴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소복으로 제주도 내의 제관을 거느리고 친히 염습하였다

 



광해군은 1637년 6월 16일 밤 제주도 어등포(지금의 행원)에 도착, 위리안치된다.

광해군은 다시 제주로 유배되는지 전혀 몰랐다. 호송자는 광해군에게 가는 곳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 위의 四面을 모두 휘장막으로 막았다가 배가 항구에 닿아야 비로소 떼어냈다. 이 때 호행병장(護行別將) 이원로가 이 곳이 제주라고 알리자 광해가 깜짝 놀라며 크게 슬퍼했다한다.

 


이후 광해는 위리안치안에서 4년 여를 외롭게 살다가 1641년(인조 19) 7월 1일 유배지의 울타리 안에서 67년을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광해군은 살아서 정묘호란때에는 구읍에서 강화 내가면 정포(井浦)로 위리안치되었고 병자호란시에는 신읍에서 제주도로 보내져 위리안치되었던 것이다.

광해군은 1641년(인조 19) 7월 1일 제주도 유배지에서 질긴 목숨을 내려놓는다. 1643년 10월 광해군의 묘는 장사를 지낸 유배지에서 경기도 남양주시로 옮겨졌다.

 



광해군은 병자호란이 끝나자마자 1637년(인조 15년) 2월 유배지를 강화도 교동도에서 제주도로  옮깁니다. 

1637년 6월 6일 어등포(제주도 구좌읍 행원리)로 입항하였고, 다음날 성내로 들어와 망경루 서쪽에 있는 적소에 위리안치 하였으며, 1641년(인조 19년) 7월 1일 67세로 유배지인 제주도 적소에서 죽었습니다.

광해군이 숨을 거둔 지 12년이 지난 1653년에 네델란드 상선 스페르베르(Sperwer)호를 타고 가다 제주섬에 표착했던 하멜은 

 



<하멜표류기>에 8월 22일 제주목에서 목사에게 조사를 받은 후, 왕의 숙부가 유배되어 생활하다가 숨질 때까지 지낸 집에 도착했다는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하멜이 왕의 숙부(실제로는 효종 임금의 큰할아버지)라고 언급한 자는 광해군입니다. 광해군의 적소는 군인 30명이 돌아가며 당직을 설 만큼 큰 집이었는데,



표류인 36명을 수용할 만한 큰 집이 필요하자, 당시 제주목사였던 이원진은 마침 비어있던 광해군 적소를 이들에게 내어준 것이라고 합니다.

광해군이 위리안치되었던 곳은 서성 안이라는 설과 남성 안이라는 설 두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적소는 1653년(효종 4) 하멜 일행이 표착했을 때 그들이 수용되었던 곳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1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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