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세계사 인물 - 중동의 미친개 리비아 - 무아마르 알 카다피[ Muammar al- Qaddaf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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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세계사 인물 - 중동의 미친개 리비아 - 무아마르 알 카다피[ Muammar al- Qaddafi]

by 생각도령 2020. 7. 10.

리비아의 군인, 정치가.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하였으며, 2011년까지 42년간 장기집권했다. 이슬람근본주의, 사회주의, 범아랍주의를 융합한 아랍공동체 건설을 주장하였으며 인민직접민주주의라는 명분을 앞세워 의회제와 헌법을 폐지하고 석유 등 국가기반시설을 국유화하여 독재권력을 강화했다. 2011년 장기집권과 철권통지에 반발해 일어난 반정부 시위로 권좌에서 물러나 은신 중 사살되었다. 저서로 《녹색서》가 있다.

 

 

1942년 리비아 시르테주 수르트에서 태어났다. 1963년 벵가지의 리비아대학을 마쳤다. 1965년 리비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이집트 가말 압델 나세르(Jamal ‘Abd an-Nāser)의 이집트 혁명 과정을 본받아 자유장교단을 결성하였다. 1969년 9월 27세의 나이에 육군 대위로 복무 하던 중 동료들과 쿠데타를 결행하여 왕정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했다.

집권 초기 국가원수·총리·국방장관을 겸임하며 반미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 사상을 기초로 한 단일 아랍국가 건설을 주장하였다. 미국과 영국의 군사기지를 철수시키고, 외국자본을 배제하였으며 이탈리아 정착민들을 국외로 추방했다. 또 석유가격을 일방적으로 공시(公示)해 주요 석유생산국들의 시장독점에 반대하였고 석유회사를 비롯한 도로, 항만, 항공 등 국가기반시설을 국유화(國有化)하였다. 이후 대규모 유전 개발과 리비아 대수로을 비롯한 대형 국토개발 사업을 추진하여 아프리카의 빈국에서 벗어나기 위한 경제개발 정책을 추진했다.

이집트, 시리아 등과 함께 아랍권의 이슬람 단일국가인 아랍 공화국 연방 건설도 추진했으나 외교관계 악화와 중동 사회의 불안으로 무산되기도 했다.  1972년 8월에는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Anwar Sādāt) 대통령과 아랍연합의 결성에 대해 합의했지만, 같은 해 10월 제4차 중동전쟁 후 카다피가 사다트의 평화정책에 반대하면서 양국의 갈등이 심화되어 합의가 결렬되었다. 또 1980년에는 시리아와의 합방을 선언했으나, 곧이어 벌어진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합방을 포기 했다.

 



리비아 국내 정치에서는 엄격한 이슬람 율법에 입각한 문화혁명을 지도하였다. 음주와 도박을 금지시켰으며 완전한 이슬람공동체를 건설을 구상하였다. 그의 정치 이론은 그가 집필한 《녹색서 The Green Book》(1976)에 밝혀져 있다. 1977년 사회주의, 이슬람주의, 범아랍주의를 융합한 자마히리야(인민권력) 체제를 선포한 그는 인민직접민주주의라는 독특한 체체 구축을 명분으로 내세워 의회제도와 헌법을 폐지하고 전제 권력을 강화하였다. 이후 장기 집권, 독재 정치, 인권 탄압, 테러 지원, 핵실험 의혹 등으로 수많은 국제적인 비난과 경제 제재 조치가 뒤따랐다.

카다피는 국제관계 경색을 타파하기 위해 2000년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자 이라크와의 외교를 단절함과 동시에 서방 국가에 개방을 선언하고 화해 정책을 쓰기도 했다. 2003년 대량살상무기(WMD) 포기 선언 후 2004년에는 대미외교관계 복원에 힘써, 이에 미국은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였다. 또, 과거 리비아를 식민 지배했던 이탈리아의 사과를 받아 들이고 과거 리비아가 이탈리아에 행했던 보복활동에 대해 유감의 뜻을 전달하는 등 대외 관계에 개선을 위한 조치를 취해왔다. 하지만 사우디 아라비아 등 친서방 아랍국가를 비난하면서 외교분쟁은 계속되었고, 국제 사회는 국유화한 석유를 통해 획득한 막대한 재원이 정권유지와 국제 테러 단체에 대한 지원에 쓰이고 있다는 사실에 비난의 목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리비아 내에서 카다피의 입지도 날로 좁아져 갔다. 42년간의 장기집권과 철권통치에 반대하는 반정부 시위가 2011년 2월에 시작된 후 카다피군은 유혈 보복을 선언하며 시민군과의 내전을 지속했다. 그러나 결국 나토(NATO)와 세계 각국의 지원 속에 시민군이 수도인 트리폴리를 장악했고, 카다피군의 세력은 날로 쇠했다. 트리폴리 함락 후 도피해 행적이 묘연했던 카다피는 같은 해 10월 20일 최종 은신처로 지목되어온 고향 시르테에서 시민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그 과정에서 총상으로 사망했다. 

카다피 재산 170조원은 리비아재건‘밑천’
무아마르 카다피 전 리비아 국가원수가 20일 사망함에 따라 그와 측근이 보유한 막대한 자산은 내전으로 황폐화된 리비아를 재건하는 밑천으로 쓰일 전망이라고 하네요.
 
정확한 규모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지난 2월 리비아 반정부 세력은 카다피 일가와 측근이 보유한 자산이 800억~1,500억달러(약 170조원)에 이른다고 주장했다고 독일 dpa 통신이 전했네요.
 
우선 유엔 결의로 각국이 동결한 카다피와 측근의 해외 자산만 해도 엄청나요.
 
해외에 동결된 카다피 측 자산은 미국과 영국에서 각각 300억달러와 500억달러나 되고, 독일에 73억유로(11조원 상당)와 스위스에 6억5,000만프랑(약 8,500억원)이 묶여 있어요.
 
리비아가 과거 식민지 종국이던 이탈리아의 금융 및 에너지, 스포츠 산업 등에 투자한 자금 규모도 36억유로(약 6조원)에 이른다고 하네요. 
 
또 카다피 일가가 사실상 사금고처럼 활용한 리비아 국부펀드(950억달러)까지 합칠 경우 그 규모는 실제로 2,000억달러에 육박할 수 있다는 계산도 나와요.
 
리비아 과도정부와 국제사회는 지난 8월 동결된 자산을 단계적으로 해제해 나라 재건에 쓴다는 데 대체로 합의했다. 동결된 자산은 유엔의 별도 결의를 거쳐 해제돼 리비아 국고로 환수된다고 합니다.
 
귀도 베스터벨레 독일 외무장관은 당시 “국가 재건을 위해 동결된 리비아 자산을 신속히 해제해야 한다”며 안보리의 결의를 촉구했다. 캐서린 애슈턴 유럽연합(EU) 외교ㆍ안보 최고대표도 같은 날 “미국이 동의할 경우 EU는 동결한 리비아 자산들을 즉각 해제할 것”이라고 밝혔어요.

 

 

무아마르 알 카다피 [ Muammar al- Qaddafi ]

 

출생-사망 :  1942 ~ 2011.10.20

국적 : 리비아

활동분야 : 군사, 정치

출생지 : 리비아 시르테주 수르트

주요저서 : 《녹색서 The Green Book》(1976,1980)

 


-지식백과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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