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한국사 인물 - 청년의사, 독립에 모든 것을 바치다 - 독립운동가 이태준[ 李泰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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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한국사 인물 - 청년의사, 독립에 모든 것을 바치다 - 독립운동가 이태준[ 李泰俊 ]

by 생각도령 2020. 7. 11.

청년 의사, 독립에 모든 것을 바치다
몽골에서 인술을 펼친 독립운동가, 이태준


죽더라도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우린 퇴각한다. 당신도 함께 떠나자!"

1921년 2월 3일, 중국군 사령관 가오 시린이 이태준 (大岩 李泰俊 1883~1921)에게 명령했다. 순간, 짧은 생각이 이태준의 머릿속을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몽골은 이미 러시아 백위군 수중에 떨어졌다. 사태는 돌이킬 수 없고, 게다가 백위군 지휘자가 그 악명 높은 운게른이라니!'

운게른 슈테른베르크 남작

당시 몽골은 정정이 극도로 불안했다. 오랫동안 만주 족의 지배를 받던 몽골은 1911년 신해혁명을 틈타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러시아와 중국의 이권다툼에 끼여 위태로운 자치에 머물러 있었다. 1921년 2월 무렵 수도 고륜(지금의 울란바토르)은 중국군이 장악한 상태였고, 이태준은 다름 아닌 중국군 사령관 가오 시린의 주치의였다.

'명령을 거역한다면 무사할까? 또 여기 남는다면 과연 운게른은 날 살려둘 것인가?'

백위파 잔당을 이끄는 운게른은 매우 잔혹한 인물 이었다. 오죽하면 별명이 '미친 남작'이었을까.
그는 열렬한 왕당파로 철저한 반공산주의자‧ 반유대 주의자였다. 백위파에 점령당하는 즉시 고륜은 무자비한 살육과 방화, 약탈에 휩싸일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자신이 목숨을 부지하려면 마땅히 가오시린을 따라가야 했다. 그러나 그는 떠날 수 없었다.

"..아니, 난 여기 남겠소."

그에게는 고륜에 남아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목숨을 담보하고라도 반드시 완수해야 할 두 가지 임무, 그 임무 때문에 이태준은 고륜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안온과 풍요를 박차고 고난의 길로

이태준은 1911년 세브란스 연합의학교(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 제2회 졸업생이었다. 졸업 후에는 세브란스 병원 의사로 일했다. 별일만 없다면, 또 식민 통치에 짓눌리는 조국의 현실을 외면할 수만 있다면, 그의 앞날은 안온하고 풍요로울 터였다.

하지만 이태준은 결코 그렇게 살 수 없었다. 1910년 국권 피탈 이래 일제의 폭압은 나날이 심해지고, 망국의 아픔은 갈수록 뼈에 사무쳐 왔다. 1909년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와 관련하여 통감부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나 세브란스 의료원에서 치료 중이던 안창호와의 만남은 고뇌하던 이태준에게 독립투쟁에 헌신하려는 열망을 북돋우는 계기가 된다.그는 의학교 선배이자 절친한 친구인 김필순과 망명을 의논했다.

"중국으로 가자. 혁명으로 왕조 정치를 뒤엎은 나라 아닌가. 가서 혁명 세력에 힘을 보태면, 그들도 우리 독립운동을 지원해 주지 않겠나?"

김필순_세브란스 1회 졸업생

중국 망명은 다급히 이뤄졌다. 1911년,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위기에 몰린 김필순이 먼저 국내를 탈출했다. 뒤이어 이태준도 신의주행 열차를 타고 망명길에 올랐다. 이때 그는 이미 혼인하여 재롱둥이 두 딸이 있었다. 동생에게 맡긴 딸들 생각에 이태준은 울적해졌다.

'언제 다시 돌아오게 될까? 살아서 아이들을 다시 볼 수나 있을까?'

상념도 잠시, 어린 딸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국권을 회복해야만 한다고 다짐했다. 이태준은 결기를 확인 하듯 어두워지는 차창 밖을 노려보았다.

며칠 뒤, 이태준은 중국 난징에 도착했다. 도착은 했으나 막막할 뿐이었다. 황급히 몸만 빠져나온 터라 여비가 모자랐다. 말이 통하지 않아 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돈이 떨어지자 그는 거지꼴로 난징 거리를 헤매었다. 다행히 한 중국인의 도움으로 의사 자리를 얻으면서 안정을 찾게 되었고, 그 이후 이태준은 점차 독립운동 세력과 연계를 맺게 되었다.

몽골 민중에게 신으로 추앙받다

1914년 무렵, 이태준은 난징을 떠나 몽골의 고륜으로 갔다. 김규식(尤史 金奎植)‧서왈보 등과 함께였다. 이들은 몽골 지방에 비밀 군관학교를 세우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었다. 정예 독립군을 길러낸다는 목표였지만, 국내에서 오기로 한 자금이 감감무소식 이었다. 정예독립군 양성 계획은 시작 단계에서 좌초하고 말았다. 김규식은 중국으로 돌아갔지만, 이태준은 몽골에 남기로 했다.

"여기엔 아직 최신 의료시설이 없소. 병이 들면 고작 기도나 하고 주문이나 외우지요. 병원을 열어 운영 하면서 독립투쟁에도 힘쓰겠소."



이태준은 고륜에 '동의의국(同義醫局)'을 개업했다. '같은 뜻을 가진 동지들의 병원'. 당시 몽골에는 성병이 만연해 있었다. 몽골인의 70~80%가 이 병에 시달리는데도 제대로 치료할 만한 의사나 병원이 없었다. 이태준은 근대적 의술로 몽골 민중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병원을 찾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고, 성병은 곧 뿌리 뽑히기 시작했다. 이태준은 고륜 일대에서 '신들린 의술'로 유명해졌다.

"까우리(高麗) 의사는 하늘이 내린 신이 틀림없어!""혹시 우리를 구하러 오신 부처님은 아닐까?"

이태준이 받은 것과 같은 몽골 국가훈장 ⓒ 동은의학박물관

소문은 왕실까지 전해졌다. 이태준은 몽골 국왕 복드칸의 신임을 얻어 어의(御醫)가 되었다. 아울러 당시 몽골에 주둔하던 중국군 사령관 가오 시린의 주치의도 맡았다. 1919년 7월, 몽골 정부는 그의 공로를 기려 외국인에게 주는 최고 등급의 국가훈장을 수여하였다.

비밀리에 독립투쟁을 전개하다

이태준은 극비리에 혁명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한인사회당 비밀당원으로 각지의 애국지사들을 잇는 연락책이었다. 특히 중국에서 내몽골로 통하는 도시 장자커우의 십전의원(十全醫院)과 연결, 장자커우와 고륜 사이를 오가며 활동하는 혁명가들에게 온갖 편의를 제공했다.

일경을 피해 몽골로 건너온 이들이 장기간 동의의국에 피신했는데, 한때 그 수가 수십 명에 달했었다. 이태준은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는 김규식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등 진료 수익 대부분도 독립운동에 쏟아 부었다. 동의 의국은 일제 감시가 미치지 못하는, 몽골 깊숙이에 자리한 또 하나의 독립운동 기지였다.

그렇다면 이태준이 목숨을 걸었던 두 가지 임무는 무엇이었을까? 첫 번째 임무는 '모스크바자금'과 관련이 있다. 모스크바자금이란 레닌 정부가 원조하는 한국 혁명운동 자금으로, 1920년 9월초 1차분 40만 루블이 지급되었다. 40만 루블은 여러 갈래로 쪼개 상하이까지 운반되었다. 위험을 피한 분산이었다. 이태준에게는 그중 4만 루블이 맡겨졌다.

또 다른 임무는 폭탄 기술자 '마자르'를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에게 데려가는 일이었다. 당시 잇단 거사가 폭탄 불발로 번번이 실패하고 단원들만 희생되자, 김원봉은 뛰어난 폭탄 기술자를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마자르는 헝가리 포로 출신으로, 고륜에서 이태준의 활동을 돕고 있었다.

폭탄 제조에는 실로 탁월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그는..(중략)..만약 저의 기술이 같은 약소국인 조선의 해방을 위하여 유용한 것이라 안다면, 마자알(마자르)은 기꺼이 약산의 일을 도울 것이라고 이태준은 장담했다. (중략)..마자알을 데려올 것을 약속하고 수일 후 고륜으로 돌아갔다. 

박태준 <약산과 의열단>

마자르와 현계옥_영화 '밀정'의 한 장면

서른여덟에 비극적 최후를 맞다

1921년 2월 3일, 가오 시린은 함께 가지 않겠다는 이태준에게 거칠게 폭력을 휘두른 뒤 철수했다. 부상은 입었지만 이태준은 끝내 고륜에 남았다. 운송해야 할 4만 루블, 그리고 김원봉에게 데려가야 할 마자르와 더불어.

이튿날, 운게른 군대가 고륜을 완전히 장악했다. 학살과 방화, 약탈이 거침없이 자행되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이태준은 그런 와중에도 기적적으로 4만 루블을 지켜냈다. 또 베이징 정부가 발행한 통행증도 손에 넣었다. 그는 마자르와 함께 서둘러 고륜을 떠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얼마 못 가 운게른 도당이 뒤쫓아 왔다. 이태준 일행은 고륜으로 다시 끌려갔다. 거세게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공산주의자들과 긴밀히 협력했다'는 올가미를 씌워 그들은 이태준을 집 안에 가둬버렸다.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시파일로프는 두 명의 사형집행인과 의사(이태준)를 데리고 다른 방으로 갔다..(중략)..사형집행인 하나가 뒤에서 불운한 의사의 뒷덜미에 밧줄을 집어던졌고, 시파일로프가 손으로(밧줄을) 잡아당겼다. 의사는 기도하듯이 중얼거리더니 이내 시체로 변해 버렸다. 

반병률 <여명기 민족운동의 순교자들>

고작 서른여덟 살, 이태준은 끝내지 못한 임무와 조국 독립의 꿈을 가슴에 품은 채 머나먼 이국땅에서 스러졌다. 그가 모스크바자금 운송과 관계있음을 운게른 도당이 알아냈을까? 만약 그렇다면 4만 루블과 동의의국 재산은 그들이 죄다 갈취했을 것이다.

자이승 전승기념탑에서 본 이태준 공원 전경 ⓒ동은의학박물관

이태준의 독립운동 행적은 사후 60여 년이 지나서야 겨우 알려졌다. 역사의 격랑에 온몸으로 맞서 독립 투쟁에 생명과 재산을 다 바쳤던 이태준. 그러나 두 딸과 아내는 자취조차 묘연하고, 고륜에 있었다는 그의 무덤도 현재로선 찾을 길이 막막하다.

현재 울란바트르 시에는 이태준 기념공원이 세워져 있다. 몽골정부가 '신인(神人)'이자 '여래불'로 몽골인을 치료해준 이태준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부지를 제공 하였고, 이태준의 모교인 연세의대 동창회가 조성비용을 제공하여 세워진 공원이다.

이태준 기념공원 내의 이태준 기념관 ⓒ 동은의학박물관

의사(醫師)이자 의사(義士)였던 이태준의 행적은, 최근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청문회에 불려왔던 여러 의사들의 행태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인술(仁術)을 넘어 의술(義術)을 추구했던 이태준과 오늘날 국립대학 병원장, 대통령 주치의 등 잘 나가는 의사들의 행태는 정확히 정반대 자리에 서 있다.

몽골정부까지 기념하는 이태준의 이름을 아는 대한민국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태준이 한국의사의 모범으로 자리매김할 날을 기다리며 조국광복의 성전에 목숨을 바친 청년 의사의 넋을 기린다.

글 : 장경원 (동화 작가 <그럭저럭 잘 자람> 등 출간)

<참고자료 및 문헌>
반병률 <여명기 민족운동의 순교자들> 신서원, 2013.
반병률 <의사 이태준(1883~1921)의 독립운동과 몽골> <한국근현대사연구> 13, 2000.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 2015. 한국독립운동사연구회 <도산 안창호 자료집> 2, 1991.

 

 

이태준 [  ]

몽골의사 이태준의 삶과 혁명적 독립운동, 건국훈장 애족장 1990

출생 - 사망 1883.11.21. ~ 1921.2. 

 

“이 땅에 있는 오직 하나의 이 조선 사람의 무덤은 이 땅의 민중을 위하야

젊은 일생을 바친 한 조선청년의 거룩한 헌신과 희생의 기념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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