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세계사 인물 - '박학다식 하고 음률에 능통 했던 조조의 여인' 채문희 蔡文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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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세계사 인물 - '박학다식 하고 음률에 능통 했던 조조의 여인' 채문희 蔡文姬

by 생각도령 2020. 7. 17.

'박학다식 하고 음률에 능통 했던 조조의 여인'

채염은 진류 陳留, 지금의 허난성 카이펑(開封) 근처) 어(圉) 사람으로 자는 소희(昭姬)이다.

 

채문희의 초상화 출생 - 사망 177년 추정 ~ 249년 추정



진(晉)나라 사마소(211~265)의 이름을 피휘하여
문희(文姬)로 고쳤다.
동한 시대의 문학가이자 명사 채옹(133~192)의 딸로 박학다식하고 음률에 정통했다.
처음에 명문가의 아들인 위중도(衛仲道)에게

시집을 갔는데,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친정으로 돌아와 살았다.

동한 말에 권신 동탁이 난을 일으켰을 때
동탁의 부장(部將)에게 잡혀가, 
헌제 흥평(興平) 2년(195)에 흉노 좌현왕(左賢王) 유표(劉豹)의 첩실이 되어서 아들 둘을 낳았다.

헌제 건안(建安) 12년(207), 채옹과 평소 친분이 있던 조조가 북방을 통일한 후 채염을 동정하여 돈을 주고 흉노에서 그녀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는 동사(董祀)라는 자와 재혼하게 하였다.
훗날 둔전도위(屯田都尉)를 지내던 동사가 죄를 범해 죽게 되었을 때 채염이 조조에게 통사정을 해 사형을 면하게 하기도 하였다.

파란만장한 삶, 채염의 <비분시>
생의 끝자락에서나마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해우는 왕소군이나 세군보다는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여기 한 여인,

채염(蔡琰)이라는 이 여인은 흉노에 잡혀가 지내다가 한나라로 돌아왔지만 그녀에게 귀국은 결코 평안이 아니었다. 왕소군의 이야기가 담긴<금조>를 지은,

한나라 말의 뛰어난 학자 채옹이 바로
채염의 아버지다.

채염은 위중도에게 시집가지만 얼마 뒤 사별한다.
또 그녀의 아버지마저 동탁을 암살한 왕윤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다.

왕윤은 동탁의 수하인 이각과 곽사 등에 의해
장안에서 처형당한다. 이후 조정을 장악한 이각과 곽사가 대립하며 서로 공격하는 동안 장안은 공포와 굶주림의 도시가 되고,

헌제(獻帝)는 장안을 빠져나가 낙양으로 피신하게 된다. 바로 이때,

이각과 곽사의 잔당을 격퇴한다는 명분으로 한나라에 투입된 흉노가 약탈을 일삼는다.

채염이 흉노에 잡혀간 것도 바로 이 시기(195년)다. 그녀는 12년 동안 흉노 좌현왕의 아내로 지내면서 아들 둘을 낳는다.

그리고 207년, 조조가 흉노에게 많은 금품을 주고 채염을 돌아오게 한 뒤 동사에게 시집보낸다.

훗날 동사가 형벌을 받아 죽게 되었을 때 채염은 조조에게 간청해 그의 목숨을 살려내기도 한다.

채염의 파란만장한 삶에서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은 두 아들과 헤어질 때였을 것이다.

<비분시(悲憤詩)>
에는 그 장면이 생생히 표현되어 있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목을 끌어안으며 울부짖는다.

“사람들이 말하길 어머니가 떠나셔야 한다는데,
다시 돌아오실 날이 있을까요?

늘 인자하시던 어머니가 지금 어째서 달라지셨나요? 우리는 아직 어린데 어째서 생각해주시지 않나요?” 채염의 눈에서도 눈물이 쏟아진다.

“아이를 보니 억장이 무너지고,
정신이 아득해 미칠 것 같다.” 이 시를 읽노라면 채염이 과연 한나라로 돌아오고 싶었을지 의문이 든다.

한나라로 돌아와 재가한 채염은
평생 그리움과 근심을 품고 살았다.

“내 배로 낳은 자식 생각하니 가슴이 메어지고 찢어지는구나”
“떠돌다가 비천해진 몸,
다시 버려질까 늘 두렵다”던 채염.

조조에게 구원받은 재녀(才女)라는 평가가 과연 진실일까. 한나라로 돌아온 것이 과연
그녀의 삶에서 구원이었을까?
어쩌면 또 다른 절망의 늪으로 빠져든 게 아닐는지.

 



진류(陳留) 어(圉) 사람으로 본명은 염(琰)이고,
자는 소희(昭姬)이다. 채염(蔡琰)으로도 불린다.
진(晉)나라 사마소(司馬昭)의 이름을
피휘(避諱, 다른 사람 이름을 피하여 지은 이름)하여 문희(文姬)로 고쳤다.

동한(東漢) 시기의 여자 문학가로 채옹(蔡邕)의 딸이다. 처음에는 위중도(衛仲道)에게 시집갔는데, 남편이 죽자 친정으로 왔다.

후에 흉노(匈奴)에 포로로 잡아가
좌현왕(左賢王)에게 받쳐져 두 아들을 두었다.
12년 후에 조조(曹操)가 북방을 통일하자,

 



돈을 주고 그녀를 데려와서 동사(董祀)에게 시집보냈다. 문학, 음악, 서법(書法)에 능했다.
저서로 《채문희집(蔡文姬集)》
이 있었으나 실전되고,

지금은 작품은 〈비분시(悲憤詩)〉 2수(首)와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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