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한국사 인물 - '문무를 겸비한 큰 호랑이 김종서(金宗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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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한국사 인물 - '문무를 겸비한 큰 호랑이 김종서(金宗瑞')

by 생각도령 2020. 9. 3.

'문무를 겸비한 큰 호랑이 金宗瑞'



나는 마땅히 고난을 주었지만,
너는 마땅히 태평을 주라.’는 구절에 이르러서
임금이 세 번이나 감탄을 하면서 말하기를, 황보인·김종서 등의 일을 가리키는 것인가
''마치 귀를 잡고 직접 명령하시는 것 같다.”

 



300년 만의 복권,

영조 22년 12월 27일은 김종서와 황보인 등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일어난 계유정난 때 화를 당한 이들과 그 후손들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김종서(金宗瑞, 1383~1453)는 세종 때 6진 개척을 주도한 인물로, 그리고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 세력에 의해서 살해된 인물로 잘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300여 년이 지난 영조 대에 복권되면서 충의의 상징으로 우리에게 각인되고 있다.

116세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자신의 재주를 자부한 신동

 

 


현재 우리는 ‘김종서’ 하면 6진 개척을 떠올리고
그를 무신으로 알고 있다.
사실 그의 부친이 무과 출신이었으니
그의 집안으로만 본다면 틀린 말도 아니다.
그러나 김종서는 문과를 통해서
관직에 진출한 엄연한 문신이었다. 

더욱 그는 조선조에서도 드물게
이직(李稷)과 함께 16세에 과거에 급제한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다.
우리가 잘 아는 정인지가 19세에, 
이덕형이 20세에 급제한 것과 비교해도
상당히 빠른 시기였다.

김종서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것 같다. 후일 정치적 입장을 달리했던 신숙주는 김종서의 추천으로 한때 그의 휘하에서 관직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신숙주 역시 재기가 넘치는 인물이었다. 

하루는 김종서가 두만강 일대의
개척과 관련한 조정의 논의가 자신과 다르자, 자신의뜻을 전달하는 글을 국왕에게 올린 적이 있었다.
김종서가 올린 글은 수만 자에 달했다고 하는데,
이때 김종서는 신숙주에게 쓰게 하고
자신은 구술하였다.

그런데 글을 써 내려가는 신숙주의 품새가 마치 평소 자신이 지어 놓은 글과 같이 줄줄 써내려 가면서도 하나도 틀린 글자가 없었다.
이에 김종서는 탄복하여,
“나는 본래부터 내 재주를 자부하고 있지만,
자네도 드물게 보는 큰 재주일세.”
라며 감탄해 마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서로의 재주를 알고 지내던
김종서와 신숙주,
그러나 그들은 결국 계유정난 때
서로 반대의 정치적 방향에 서게 되었으니
역사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26진을 개척한 용맹한 장수이면서,
동시에 [고려사절요]를 편찬한 뛰어난 문신

김종서 하면 무엇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6진 개척을 주도한 사실일 것이다.
훗날 허균은 이를 높이 평가하면서,

이와 관련해서 김종서가 올린 상소를
“세상의 보통 사람이나 어린 아이의 적은 지혜와 얕은꾀로 입만 가지고 때워 국가의 일을 망친 자들이 기가 막혀 주둥이를 감히 벌리지 못하게” 한 것이라 하였다. 

김종서가 주도해서 개척한 6진이라 함은
두만강 하류에 위치한
종성·온성·회령·경원·경흥·부령의
여섯 진을 말한다.

이곳은 조선 왕조의 입장에서 왕조 건설의 모태가 되었던 이른바 ‘흥왕(興王)의 땅’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지역이었다.
조선으로서는 버릴 수 없는 땅이었다.
특히 세종의 회복 의지는 강하였다.

김종서가 이곳과 관련을 맺게 된 것은
1433년 12월 함길도 도관찰사에 제수되면서부터였다. 당시 여진족의 일파인 우디거족이

알목하(斡木河 : 지금의 하령) 지방의 오도리족을 습격해 그 추장인 건주좌위도독
동맹가티무르(童猛哥帖木兒) 부자를 죽이고
달아난 사건이 일어났다. 

세종은 여진족의 내분을 이용해 북방 개척에 착수,
그 책임자로 김종서를 임명한 것이었다.

함길도에서 생활하던 김종서는,
화살이 책상에 날아왔으나 안색도 변하지 않고,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누차 독약을 넣었으나
죽지 않은 큰 호랑이(大虎) 그 자체였다. 

김종서의 주도로 이곳에 진을 설치하는 한편 남방 지역의 백성을 이주시켜 정착 생활을 하도록 하였다. 6진의 설치는 우리나라 북쪽 경계가
두만강 연안에까지 미치게 되는 계기가 된
중요한 사건이었다.

 

 


김종서는 또한 문종 대에는 [고려사절요]의 편찬을 주도하였다. 조선조 건국 이후 이전 왕조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은 이미 태조 대부터 시작되어

1395년 [고려국사]가 편찬된 바 있고 이것이
이후 약 5차례의 개수 과정을 거쳐
1451년 [고려사]로 완성되었다. 

이때 김종서는 [고려사]가 주제별로 편찬되어
열람에 불편하니 일자별로 기록한
사서를 편찬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리고 5개월 만에
[고려사절요] 35권을 완성해 올렸다.

고려 왕조 역대의 역사에서 정치에 귀감되는
내용을 중심으로 편찬한 [고려사절요]는
후대 임금들이 정치에 참고하기 위해
편찬한 것이므로 상당히 교훈적인 역사책이다.

아울러 편찬 주체가 [고려사]는 국왕이 중심이 된 데 비해 [고려사절요]는 신하들이
중심이 되었으므로 신하 중심의 사서라고
평해지기도 한다.

고명대신,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다

문종은 승하 직전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는
정부를 개편한 바 있었다.
이때 영의정에 황보인을,
좌의정에는 김종서를,
우의정에는 정분을 각각 임명하였다.

그리고 승하에 임박해서는 이들을 비롯해
육조 판서 등을 불러놓고 세자를 앞에 세운 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해놓은 일 없이 가거니와 잊지 못하는 것이
이 어린 세자요. 나는 이제 경들에게 간절히 부탁하노니, 부디 저버리지 말고
힘써 보호하여 주기 바라오.

이 자리에 참석했던 어느 누가 부왕의 세자에 대한 애틋한 심정을 모르겠는가?
이 순간 모두 세자에 대한 충성을 다짐했으리라.

그렇게 문종이 덧없이 승하하고
그 뒤를 열두 살의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이런 순간에 수양대군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전국에서 책략가와 한량들을 모았다. 한명회∙권람∙홍윤성 등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여러 모사와 수많은 장정을 불러 모아
인적 자원을 확보하게 된 수양대군은
서서히 그 야심의 날개를 펼치게 되었다.

이러한 수양대군에게도 만만치 않은
존재가 있었으니, 그것은 단종을 보필하고 있는
고명을 받은 대신들,
그중에서도 좌의정 지위에 있는 김종서였다.

그는 수양대군이 대사를 추진해 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장애가 되는, 실로 수양대군에게
가시와 같은 존재인 동시에,
또한 제일 먼저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될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그를 살려두고는 대사를
도모하기 불가능함을 깨달은 수양대군은,
마침내 치밀한 타도의 계획을 세운 다음,
친히 양정,
유숙을 비롯한 몇 사람의 장사를 대동하고,

새문 밖 김종서의 사저로 향하여 거사에
성공함으로써 걸림돌을 제거하였다. 

이렇게 한순간에 두만강의 벌판을 호령했던
큰 호랑이 김종서는 역사 속에 묻혀버렸다.

이 날은 국왕과 신하들이 경연에서 당태종이
태자를 위해 지었다고 하는 [제범]을 강하는 날이었다. 마침 황보인과 김종서의 후손들이 신원을 청원하기 위해 올린 글이 있었는데, 이때 이 글이 논란되었다. 

국왕은 처음에는 이들의 복권을 주저하였다.
이들을 복권한다는 것은 자신의 선조인 세조의 찬탈을 자인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자리에 참석했던 신하들의 입장은
영조와 달랐다. 영의정 김재로는 김종서를 복권하는 것은 태종이 즉위 직후 정몽주를 복관한 사실과 같다고 하면서 신원을 요청하였다.

더하여 세조도 아들인 예종에게
‘나는 고난을 주었지만 너는 태평을 주라.’
라고 하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주저하는 영조를 압박하였다.
영돈녕부사 조현명 등도 이 사실을 상기시켰다. 

마침 홍문관에 소장되어 있던 [제범]에
세조의 훈사(訓辭)가 첨부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영조는 즉시 책을 가지고 오도록 한 뒤 앞의 구절을 말하면서 이들의 신원을 명령하였다.

실로 이들 사후 300여 년 만의 일로,
영조에 앞서 숙종 대에 이미 단종과 사육신이 복권되면서 이들 후손들이 관직이 등용된 적은 있었으나 정작 자신들의 복권은
이때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로써 김종서 등은 사육신과 마찬가지로
충의(忠義)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물론 이는 당시 신료에게 군주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려는 국왕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기는 하지만,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역적에서 충의의 상징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김종서 유허지가 있는 의당면 월곡리는 조선 초기의 명재상이자 명장이며 절의인으로 이름 높은 절재(節齋) 김종서(金宗瑞)의 생가 터와 김종서를 배향하던 사우 요당서사(蓼塘書社)가
있던 마을이다.

김종서는 천태산 아래 하월곡리에서 태어났다.
죽은 후 이곳 천태산 아래에 묻었다가 장기면 대교리 밤실로 이장하였다.
이 마을의 비계실은 김종서의 저택과 초당이 있어 오래도록 정승골이라 불렸다.

변천

김종서의 조부인 김태영(金台泳) 때에
공주에 터전을 마련하였다고 추측된다.

전언에 의하면, 조부인 김태영이 순천과 한양을 왕래하기 어려워 중간 정도인 공주 요당에
저택을 마련하였다고 하며,

김종서의 묘지문이나 실록의 기사를 통해서도
김종서의 선대가 공주에 살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여기에서 김종서의 부인이 전의이씨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의이씨는 공주와 전의 일대에 세거하였던
토성으로 사회경제적 기반이 튼튼했으며,

후일 김종서의 아들 김승벽이 계유정난 이후
전의 사람 이로(李老)의 집에 피신하였다는
사실이 있어 그 사실을 더욱 확고하게 해준다.

이러한 인연으로 월곡리에는 요당서사가 건립되어 김종서와 함께 계유정난으로 피화된
황보인(皇甫仁), 정분 등이 함께 배향되었으나
1871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어 터만 남아 있다.

김종서 유허지는 김종서 장군의 순천김씨 가문이 멸문을 당한 이후 현재까지
다른 가옥이 건축되지 않은 상태로 보존되면서
‘김종서 생가지’로 불리었다.

의당초등학교 개교(1927년) 이후
현재까지 학생들의 역사 교육 장소로
보존해 왔으며, 의당 초등학교를 건립할 때에
이 부지를 확보하여 관리하였다.

 



1960년대까지 의당초등학교
(당시 의당국민학교)에서 학교와 학생 중심으로 관리하던 생가지는 1981년 공주시
(당시 공주군)에서

충익공절재김종서장군유허비
(忠翼公節齋金宗瑞將軍遺墟碑)’를 세우고
주변을 정리하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94호로으로 선정하였다.
이 비들은 모두 1980년 박천규가 짓고
정태희가 써서 세웠다.

김종서 유허지는 유형의 대상 유적이 없고
고증의 어려움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였다.

최근 그 한계와 문제점들이 극복되어
공주시에서는 김종서 장군을 공주의 인물로 추앙하고 학술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2005년 10월 31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94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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