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세계사 - 초상화로 남은 비운의 공주 '마르가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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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세계사 - 초상화로 남은 비운의 공주 '마르가리타'

by 생각도령 2020. 7. 5.

'초상화로 남은 비운의 공주'


20세기의 스페인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Ortega Y Gasset, 1883-1955)는 17세기의 스페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 de Silva Velázquez, 1599-1660)의 삶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벨라스케스의 인생에서 중요했던 사건은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궁정화가로 발탁된 것이다. 그것 말고는 그의 삶에서 이렇다 할 만한 큰 사건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한 번 혼인했으며, 오로지 한 사람의 친구(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를 두었고, 한 작업실(궁정)에 파묻혀 그림을 그렸다.

 

 


물론 이런 표현은 지나치게 한 사람의 삶을 단순화한 느낌을 준다. 그는 스물네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궁정화가가 됐으나 이탈리아로 두 번 여행을 떠났고(두 번째 여행에서는 왕이 돌아오라고 요청하는데도 끈질기게 일 년이나 더 머물러 있었다), 거기서 사생아를 낳은 것으로 추정되는 등 나름의 변화와 일탈을 시도했다. 

신분상승 욕구도 꽤 강했던 것으로 여겨져 그저 그림만 그리며 주어진 대로 살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서양미술사상 그만큼 인간적으로 왕과, 나아가 왕가의 사람들과 친밀했던 궁정화가도 없었다는 점에서, 또 궁정화가로서의 직분에 죽는 날까지 매우 충실했다는 점에서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지적은 나름의 진실을 담고 있다. 

그의 일생을 돌아보건대 궁정화가로 발탁된 것과 비교할 수 있는 사건일랑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펠리페 4세가 그를 얼마나 아꼈는지는 여러 궁정화가 중 유독 벨라스케스만이 왕의 초상을 그릴 권한을 갖도록 한 데서 잘 알 수 있다. 심지어 왕은 벨라스케스의 작업실 열쇠를 따로 하나 얻어 아무 때고 틈만 나면 그의 작업실을 방문했다고 한다.

벨라스케스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며 국사에 지친 머리를 식혔던 것이다. 불과 여섯 살에 불과한 두 사람의 나이 차도 그렇고(펠리페 4세는 1605년생이다), 서로에 대한 두터운 신뢰도 그렇고, 다른 왕과 궁정화가 사이에서는 보기 어려운 끈끈한 우정이 이렇듯 두 사람의 평생을 묶어주었다.

이런 관계를 고려하면, 벨라스케스가 펠리페 4세의 딸 마르가리타 공주(Infanta Margarita Teresa, 1651-73)를 얼마나 살뜰한 마음으로 그렸을까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어느 궁정화가가 왕가의 사람들을 그리면서 정성을 다하지 않았을까 마는-고야가 그린 [카를로스 4세 일가의 초상]처럼 의도적인 비하가 녹아들어 있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긴 하다-, 그래도 벨라스케스처럼 따뜻한 시선으로 공주를 그린 그림은 찾아보기 어렵다. 마치 삼촌이 조카를 그리듯 그의 붓끝에는 사랑과 정이 묻어 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유명한 [시녀들](1656/57)이다.

전경 가운데 환한 빛을 발하고 있는 작은 소녀가 바로 마르가리타 공주다. 왼편에서 시녀 하나가 무릎을 꿇고 시중을 들고 있고 오른쪽으로 다른 시녀들과 시종, 보모, 그리고 키 작은 광대들이 개 한 마리와 함께 둘러서 있다.

왕과 왕비는 어디 갔을까? 왕과 왕비의 초상화 그리는 장면을 주제로 한 그림이라면 왕과 왕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우선 이상하다. 바로 그 같은 점이 이 그림을 미술사상 오랫동안 흥밋거리로 만들어놓았다. 

단적으로 말하면, 왕과 왕비는 지금 그림 밖에 있다. 그러니까 우리처럼 관객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이 왕과 왕비를 보며 맨 왼쪽의 화가, 곧 벨라스케스는 그림을 그리고 있고(왕과 왕비를 관찰하며 그리느라 캔버스 가장자리 밖으로 몸을 훌쩍 뺐다), 공주는 곱게 차려입은 채로 엄마 아빠 앞에서 애교를 부리고 있다.

공주의 머리 위, 저 뒤쪽 벽에 걸려 있는 거울에 어렴풋이 왕과 왕비의 모습이 비치는데, 워낙 흐릿하게 반사되어 그들의 표정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아마 지금 공주의 재롱에 무척이나 흐뭇해하고 있지 않을까. 

부모의 그 자랑스럽고도 애틋한 마음은 공주의 모습을 눈부시리만치 밝고 환하게 그려낸 화가의 붓 길을 통해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꼭 공주라서가 아니라, 딸인 까닭에 금지옥엽이 아니겠는가. 화가에게도 보석같이 사랑스러운 존재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녀는 불행히도 1673년 불과 스물두 살의 나이에 요절했다. 이 귀여운 공주의 이른 사망은 무덤에 있던 벨라스케스에게도 매우 가슴 아픈 소식이었을 텐데, 어쨌든 그녀가 요절한 이면에는 이 집안의 남다른 근친혼 풍습이 어느 정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펠리페 4세가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하고 마르가리타의 어머니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안나와 결혼한 것은 1649년의 일이다. 이때 마리안나가 열네 살이었으니 두 사람의 나이 차는 무려 서른 살이나 된다. 

마리안나는 원래 펠리페 4세의 전처소생 발타사르 카를로스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발타사르가 일찍 죽는 바람에 왕위가 끊길 것을 걱정한 펠리페 4세가 그녀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는 합스부르크가의 스페인 문중과 오스트리아 문중이 빈번히 결혼을 통해 지속적으로 가까운 혈연관계를 유지해온 관례에 따른 것이다.

10세기 경 스위스와 알자스 지방에서 소영주(小領主)로 출발한 합스부르크가는 1273년 처음으로 왕(독일 왕 루돌프 1세)을 배출한 이래 줄곧 번성해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을 다스리는 유럽의 대명문가가 되었다. 

16세기 중반 카를 5세의 양위 과정에서 두 문중으로 나뉘는데, 두 문중은 이후에도 결혼을 통해 그 긴밀한 관계를 공고히 했다. 마리안나의 어머니 마리아 공주가 펠리페 4세의 누이이므로 두 사람의 관계도 엄밀히 말해 삼촌과 조카의 관계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첫아이 마르가리타 공주 역시 일찍부터 오스트리아 문중의 상대와 결혼하도록 집안 차원에서 약혼이 되어 있었다. 삼촌이자 사촌이기도 한 레오폴트 1세가 그 상대였다. 

1666년 결혼식이 치러지기 전까지 스페인 문중에서는 마르가리타의 모습을 정기적으로 화폭에 담아 오스트리아 문중으로 보냈다. 미래의 시댁에 그림으로 계속 문안 인사를 드린 셈인데, 그 시가가 외가이자 또 먼 친가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누적된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적 폐해를 충분히 예상해 볼 수 있다.

결국 마르가리타는 시집 간 지 햇수로 7년(엄밀히 따지면 6년 3개월)만에 사망했으며, 그녀의 남동생이자 왕위 계승권자였던 펠리페 프로스페르 역시 불과 네 살에 유명을 달리했다. 

순혈을 지키려는 대 왕가의 노력이 오히려 갈수록 혈통을 옥죄어 갔던 것이다. 어쨌든 그녀가 성장해 가는 모습을 그림을 통해 정기적으로 확인하려 한 오스트리아 문중 덕분에 벨라스케스가 그린 그녀의 단독 초상이 현재 빈 미술사 미술관에는 모두 세 점 남아 있다.

 



벨라스케스가 1653~54년경에 그린 [분홍 가운을 입고 있는 마르가리타]는 이 가운데 공주가 제일 어릴 적의 모습을 담고 있는 초상이다. 두세 살이나 되었을까, 아직 젖살이 예쁜 나이임에도 그 또래의 아이답지 않게 얌전하고도 다소곳하게 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공주는 지금 오른손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왼손에는 부채를 들고 있다. 이런 자세는 매우 형식적인 것으로, 이른바 ‘위세 초상(swagger Portraits)’에 속하는 것이다. 대체로 고귀한 신분의 사람이 당당하게 선 자세로 관객을 굽어보듯이 바라보는 초상화를 위세 초상이라고 하는데, 어린아이를 모델로 해서 그리는 데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형식이라 하겠다. 

하지만 법도가 엄한 왕가의 친척들에게 아이의 모습을 확인시켜 주기 위한 것인데다 또 정혼을 해놓고 일종의 ‘맞선용 사진’으로 주고받은 것이다 보니 화가는 그에 걸맞은 예를 갖춰 공식 초상화의 표현 관례를 따른 듯하다.
이런 공식 초상을 그리면서도 화가는 아이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사랑을 은근하게 표현했다. 어쩌면 왕가의 혈통을 타고난다는 것은 아이 입장에서는 지독한 불행일 수 있다. 

궁정의 복잡한 예절과 법식에 매여 자라나야 하고 마르가리타의 예에서 보듯 심지어 태어나자마자 혼처가 정해져 이렇듯 유년기부터 ‘시댁’을 위한 모델 서기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도 아이는 역시 아이일 수밖에 없다. 

마르가리타의 얼굴에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마음껏 뛰놀고 싶은 욕구가 꿈틀거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포동포동한 얼굴과 손으로 어른들의 사랑과 관심을 얻고자 하는 본능적인 열망을 드러낸다. 

화가는 이 같은 공주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녀를 꼭 껴안아주고 싶었을지 모른다. 모두 위선의 가면을 쓰고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처럼 따뜻한 시선의 화가와 눈을 맞출 수 있었다는 것은 짧은 생애를 살다간 마르가리타에게도 분명 행운이요 위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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