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한국사 인물 - 조선후기 강화유수,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 채제공[ 蔡濟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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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한국사 인물 - 조선후기 강화유수,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 채제공[ 蔡濟恭 ]

by 생각도령 2020. 7. 6.

조선 영조대왕의 치세기의 일입니다.
한양에 살던 채제민이란 청년이 있었는데 명색이 양반의 씨앗이었지만 일찌기 부모를 잃고 일가친척도 없이 떠돌았습니다. 여러해 모아둔 돈으로 평양에 가서 장사를 시작하다가 실패하여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숙소로 삼았던 집의 딸과
서로 눈이 맞았고, 신분상승의 욕구가 많았던
집주인은 서울의 양반집 아들인 채제민을 데릴사위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할일없이 놀고 먹기만 하는 사위를
몹시 미워하게 된 장인이 사위에게 실망하여
그를 내쫓으려고 할 무렵, 평양땅에 채제공이
평양감사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채제민의 장인은 평양감사가 희귀성인 "채씨"였으며
돌림자도 가운데 "제"자를 사용하고 있어서 사위의 성이 같고 항렬도 같았으므로 아마 일가라도 되나보다 생각하고 사위더러



“여보게, 이번 감사가 채제공이란 분인데
혹시 아는 사인가?”하고 물었다.

이에 채제민은
“안다 뿐입니까. 제 사촌형님인데...”하고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그러자 장인은 깜짝 놀라면서도
사위를 내세우면 주변에 명분도 서고 큰 이득을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사위에게
“그럼 뵈러 가야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전혀 본적도 없는 채제공 감사를 안다고
큰소리를 친 채제민은 이 말에 “네, 뵈러 가야지요,
하지만 이 꼴을 하고 서야 갈 수가 있겠습니까? 

의관도 준비하고 다른 인사치레도 준비를 해야 가지요”라며 옷을 만든다 무엇을 준비해야 한다면서 채제민은 평양감사를 만나러 가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었습니다.

급기야는 더이상은 감사를 만나러가지
않을 수 없게 된 채제민은 벌레 씹은 표정으로
관아 앞에 나아가 다짜고짜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관원들이 다가와 그 연유를 물었으나
감사를 직접 만나야만 대답을 하겠노라며 계속 대성통곡을 하였습니다.

관영밖의 이러한 소란을 전해들은
평양감사는 채제민을 관아로 들게 하였습니다.

평양감사 앞에 앉은 채제민은 무조건
"저좀 살려주십시오"하며 석고대죄를 하였는데

이에 당황한 감사는
“넌 어디서 온 누구인가?”라고 묻자

“한양에서 온 평강채씨 채제민입니다.””

"그래?
채제민이라~
허어~
나하고 본관과 항렬이 같구나”하였다.

 



이 말에 용기를 얻은 채제민은 우는 것을
그치고 “감사님의 성과 본관이 같고 항렬이 같기에
저의 장인께 감사를 사촌형님이라 거짓말을 했으니
이 어찌 큰 죄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제 목을 치십시오”라 하였다.

자초지종을 들은 평양감사는

하하하!
“게 무슨 소리냐,?

내가 너의 사촌형이 되면 될게 아니냐. 좋다,
객지에서 동생하나 얻어서 좋고 너도
형을 얻어서 좋고...”

감사는 사람을 시켜 자신의
부인을 불러오게 하더니

부인보고

“여보, 내 사촌동생이요”하고 인사시키고
그 아들들에게는 채제민을 작은 숙부뻘이 되는
아저씨라 인사시켰다.



그리고는 “여보게!
자네의 장인하고 함께 찾아오게나.
그래야 여기 있는 평양땅에서 지내는 동안에 처갓집으로부터

무시당하지 않고 당당하고 편할 것 아닌가?”하니
채제민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장인이
“그래 뵙고 오느냐” 하고 물으니

“네, 뵙고 왔습니다. 감사께서 장인도 뵙자고 하니 빨리빨리 갑시다” 하며 급히 음식과 선물을 준비해 가지고 갔습니다.


그랬더니 평양감사 채제공이 버선발로
뛰어 나오면서 ...

“사돈 어서 오십시오”라는 인사를 하고는
“아우가 일찌기 부모님을 잃고 방황하더니 집을 나간지가 오랜데 생사를 몰라서 걱정을 했더니 이렇게 사돈의 따님과 결혼까지 하였으니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뒤로는 장인은 일가 친척은 물론이고
친구들과 이웃에게 사위가 평양감사의 동생이 된다는 사실을 떠벌리고 자랑하는 재미에 빠져서 사위를
극진히 대했다고합니다



채제공이 평양감사 임기 동안에 항상
아우 채제민을 가까이 두더니 영조대왕의 부름을
받고 영전되어 한양으로 들어갈 때는
채제민도 데려갔습니다.

그리고는 지금 돈의동에다가 아래채,
위채 집을 짓고서는 위채는 채제민이 살고, 아래채는 채제공이 살아서 의를 두텁게 했다고 합니다.

"채씨 형제"간의 의리는
당시에 형제간 우애의 표상이 될정도로
관심을 끌었다고 합니다

채제공은 후덕한 인간애는 물론이고 충성심도 남달랐습니다

영ㆍ정조시대는 조선 후기
르네상스 시대라고도 합니다. 채제공은 영조와 정조의 충신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영조실록에도 사관이
조손간의 사적인 대화를 기록으로 남겼으니
영조가 세손(후에 정조대왕)에게

"진실로 사심이 없는 나의 신하이고
세손(정조)의 충신이다."


이는 일찍이 영조가 채제공을 일러 손자인
정조에게 한 말입니다.

채제공은 정조가 왕이 아닌 세손시절부터
조정에서 세손을 폐위시키려는 조직적인 움직임을 앞장서서 막아냈으며 궁궐수비를 책임지며 세손을 살해하려는 자객들을 막아내기도 했던 것입니다.



정조대왕의 치세기에
채제공은 당파에 치의치지 않으니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신료중의 한 명이었으며 좌의정과
영의정에 이르렀습니다.

 

 

 

채제공 [  ]

조선후기 강화유수,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평강(). 자는 백규(), 호는 번암()·번옹(). 효종 때 이조판서·대제학을 지낸 채유후()의 방계 5대손이며, 채시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채성윤()이고,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채응일()이다. 어머니는 이만성()의 딸이다. 홍주 출생.

1735년(영조 11) 15세로 향시에 급제한 뒤 1743년 문과정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748년 한림회권() 때 영조의 탕평을 표방한 특명으로 선발되어 청요직인 예문관사관직을 거쳤다. 1751년에는 중인()의 무덤이 있는 산을 탈취했다 하여 1년 이상 삼척에 유배되었다.

1753년에 충청도암행어사로 균역법의 실시과정상의 폐단과 변방대비 문제를 진언하였다. 1755년 나주 괘서사건이 일어나자 문사랑()으로 활약했고, 그 공로로 승정원동부승지가 제수되었다. 이후 이천도호부사·대사간을 거쳤고, 『열성지장()』 편찬에 참여한 공로로 1758년에 도승지로 임명되었다.

이 해 사도세자와 영조의 사이가 악화되어 세자 폐위의 비망기가 내려지자 죽음을 무릅쓰고 막아 이를 철회시켰는데, 이 사건으로 하여 후일 영조는 채제공을 지적하여 “진실로 나의 사심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라고 정조에게 말했다 한다.

이후 대사간·대사헌·경기감사를 역임하던 중 1762년 모친상으로 관직을 물러나자, 이 해 윤5월에 사도세자의 죽음이 있었다. 복상 후 1764년부터 개성유수·예문관제학·비변사당상을 거쳐 안악군수로 재임 중 부친상을 당하여 다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1767년부터 홍문관제학·함경도관찰사·한성판윤을, 1770년부터는 병조·예조·호조판서를 역임하고, 1772년 이후 세손우빈객·공시당상()이 되었다. 1775년 평안도관찰사 재임시에 서류통청()은 국법의 문제가 아니므로 풍속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 상소로 인하여 서얼출신자에게 구타당하는 사건이 생기기도 하였다.

이후 영조의 깊은 신임과 함께 약방제조로 병간호를 담당하기도 했고, 정조가 왕세손으로 대리청정한 뒤에는 호조판서·좌참찬으로 활약하였다.

1776년 3월에 영조가 죽자 국장도감제조에 임명되어 행장·시장·어제·어필의 편찬 작업에 참여하였다. 이어 사도세자 죽음에 대한 책임자들을 처단할 때 형조판서 겸 판의금부사로서 옥사를 처결하였다.

또한 정조 특명으로 사노비()의 폐를 교정하는 절목을 마련하여 정1품에 이르렀다. 이 사노비절목은 점차 사노비의 수효를 감소시켜 1801년(순조 1)의 사노비 혁파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후 규장각제학·예문관제학·한성판윤·강화유수를 역임하였다.

1780년(정조 4) 홍국영()의 세도가 무너지고 소론계 공신인 서명선()을 영의정으로 하는 정권이 들어서자, 홍국영과의 친분, 사도세자의 신원에 대한 과격한 주장으로 정조 원년에 역적으로 처단된 인물들과의 연관, 그들과 동일한 흉언을 했다는 죄목으로 집중 공격을 받아 이후 8년 간 서울근교 명덕산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다.

1788년 국왕의 친필로 우의정에 특채되었고, 이 때 황극()을 세울 것, 당론을 없앨 것, 의리를 밝힐 것, 탐관오리를 징벌할 것, 백성의 어려움을 근심할 것, 권력기강을 바로잡을 것 등의 6조를 진언하였다. 이후 1790년 좌의정으로서 행정 수반이 되었고, 3년 간에 걸치는 독상()으로서 정사를 오로지 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이조전랑의 자대제() 및 당하관 통청권의 혁파, 신해통공정책 등을 실시했으며, 반대파의 역공으로 진산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793년에 잠깐 영의정에 임명되었을 때는, 전일의 영남만인소에서와 같이 사도세자를 위한 단호한 토역()을 주장하여 이후 노론계의 집요한 공격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그 뒤는 주로 수원성역을 담당하다가 1798년 사직하였다.

문장은 소()와 차()에 능했고, 시풍은 위로는 이민구()·허목(), 아래로는 정약용()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또한, 학문의 적통()은 동방의 주자인 이황()에게 시작하여 정구()와 허목을 거쳐 이익()으로 이어진다고 하면서 정통 성리학의 견해를 유지하였다.

때문에 양명학·불교·도교·민간신앙 등을 이단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들 사상도 수기치인()의 측면에서 선용할 수 있다면 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천주교[西]에 대해서도 패륜과 신이적 요소를 지닌 불교의 별파로서, 이적()인 청나라 문화의 말단적인 영향이라고 인식하였다. 그러나 서학을 믿는 자에 대하여 역적으로 다스리라는 요구를 당론이라 배척하고, 정조의 뜻을 받들어 척사()를 내세우면서도 교화우선 원칙을 적용하려 하였다.

자신의 시대를 경장이 필요한 시기로 생각했으나, 제도 개혁보다는 운영의 개선을 강조, 중간수탈 제거, 부가세 폐단의 제거들을 추진하고 간리()의 작폐를 없앰으로써 국가재정 부족을 타개하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하였다.

상업 활동이 국가 재정에 필요함을 인식했으나 전통적인 농업우선 정책을 지켰다. 또한,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는 사족() 우위의 신분질서와 적서()의 구별을 엄격한 의리로서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영조연간 청남()의 지도자인 오광운()과 강박()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채팽윤()과 이덕주()에게서 시를 배웠다.

친우로는 정범조()·이헌경()·신광수()·정재원()·안정복() 등이 있고, 최헌중()·이승훈()·이가환()·정약용 등이 그의 정치적 계자가 된다.

순조 때 유태좌()가 청양()에 그의 영각()을 세웠고, 1965년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에 홍가신()·허목·체제공을 모시는 도강영당()이 세워졌다.

저서로 『번암집』 59권이 전하는데, 권두에 정조의 친필어찰 및 교지를 수록하였다. 그는 『경종내수실록』과 『영조실록』·『국조보감』 편찬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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