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한국사 인물 - '이제 병고치러 가세' - 원두표[ 元斗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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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한국사 인물 - '이제 병고치러 가세' - 원두표[ 元斗杓 ]

by 생각도령 2020. 7. 21.

이칭별칭  : 자건(), 탄수() 탄옹(), 시호 충익()

시대 : 조선

출생 - 사망 : 1593년(선조 26) ~ 1664년(현종 5)

성격 : 문신

출신지 : 미상

성별 : 남

본관  : 원주()

관련사건 : 인조반정

대표관직(경력) : 우의정, 좌의정

 

'이제 병고치러 가세'

은평구 불광동 독박골에는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당시 큰 공을 세운 원두표 장군과 관련된 옛 이야기가 전해진다.

원두표 장군이 바위굴 근처에 머물면서 타인의 접근을 금지하기 위하여 염병을 고치러 왔다고 둘러댄 것을 본보기로 하여,

반정을 모의하였던 사람들이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염병이 걸렸다고 둘러대어 거사의 암호를 ‘이제 병 고치러 가세.’라고 하였다고 한다.

불광동 연신내에는 산림감수 이야기가 전한다. 악의없는 거짓말을 잘하여 동리 사람들을 웃기거나 종종 골탕을 먹이는

고씨(高氏)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모내던 사람들이 박서고개 개천가를 지나는 고씨를 불러 놓고 ‘거짓말이나 한 마디 하고 가게’하고 청하였다.

이때 고씨는 ‘군(郡)에서 산림감수가 나왔다는데,
나도 이렇게 한가히 이야기할 때가 아니야.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는 총총히 사라져버렸다. 이때 고씨의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그만 먹던 밥 사발을 던져버리고,

제각기 자기 집쪽으로 급히 돌아갔다.
땔감으로 생나무를 한 것이 걸리면 곤욕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림감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제야 고씨에게 감쪽같이 속은 것을 알아차렸다.
한창 바쁜 모내기철에 헛시간을 보낸 마을 사람들이,
그 후 고씨를 만나자 모두 원망하였으나, 고씨는 “그게 내 잘못이오?”라고 했다고 한다.

 



신사동 고택골 명당 이야기가 있다.
도장을 파는 직업으로 가난하게 살던 이주경이란 사람이 꿈속에서 나타난 하얀 도포 입은 노인이 정해주는 무악재 고개 넘어 고택골 앞에 부친의 시신을 안장한 뒤에 큰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아버지를 안장하고 돌아오던 날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토지에 대한 측량령을 내려 많은 사람들이 측량할 자기 땅문서에 찍을 도장을 만들려고 도장 가게 앞에 몰려들었다는 것이다.

구파발동에는 구파발 대장간들이 임진왜란 당시 평양으로 피난하던 선조를 위기에서 구했던 이야기가 전해진다. 무거운 쇳덩이를 제작하여 왜군이 쫓아오는 길목에 놓고,

아군은 가짜 쇳덩이를 솜뭉치로 만들어 가볍게 들고 가게 하여, 조선 군사들이 천하장사처럼 보이게 하여 추격을 늦추었다고 한다.

불광동에는 임진왜란 때 삼각산 노적봉을 마치 쌀가마니 쌓아놓은 것처럼 보이게 하고 창릉천에 석회를 풀어 쌀 씻은 물처럼 보이게 하여 왜군을 격퇴하게 하였다는 밥할머니 이야기가 전한다.

밥할머니는 불광동 즉 연신내 사거리에서 동쪽으로 보이는 산 아래 부근에서 대대로 집성촌으로 살아온 해주오씨(海州吳氏)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앞을 내다보는 선견지명이 남달랐고, 생김새는 키가 호리호리하고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대단하였다고 한다.

또 밥할머니는 권율장군의 행주대첩 때에는 인근 마을의 부녀자들을 이끌고 행주산성으로 들어가 치마 위에 덧치마를 만들어 두르고 주변의 돌들을 치마폭에 담아 날라 행주치마의 설화를 낳게 하기도 하였다.

이런 혼란한 전쟁의 와중에서도 밥할머니는 인근 동리의 부녀자들을 동원하여 아군들의 밥을 일일이 만들어 나눠주었고, 이런 연유로 오씨 할머니를 밥할머니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밥할머니는 이후 전멸 위기에 놓인 아군을 구출한 슬기로운 사람으로 여겨져 민간에서 높이 추앙되었으며, 선조가 그 공적을 기려 창릉 모퉁이에 석상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 때 훼손되어 땅에 묻히기도 하였으나
광복 직후 다시 찾아 세웠는데, 1993년 고양시 삼송동 통일로 주변, 일명 숫돌고개 중턱의 도화공원 내로 1993년에 옮겼다.

밥할머니의 실제 묘가 불광동 150번지에 최근까지 있었으나,
1976년 자손들에 의해 화장되었다고 한다.

진관내동에는 상나무배기 우물이 하나 있는데,
물맛에 늘 향내가 배어 있고 도술을 부리는 금계수탉이 알을 낳는다고 하여 만병통치 약수라고 전한다.

진관내동에 여기소라는 연못이 있었다. 북한산성을 쌓을 때 공사를 감독하던 관원을 사랑하던 기생이 남장을 하고 찾아갔지만 면회금지로 만나지 못하자 연못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

공사가 끝난 후 기생이 찾던 관원이 이 사실을 알고,
그 연못에 찾아가 ‘조금만 더 기다리지 참지 못하고 여기서 죽었단 말이오.’ 하면서 통곡하였다고 한다.

그 후 이곳을 ‘너 여(汝), 여기 기(其),
못 소(沼)’의 뜻이 담긴 ‘여기소’(汝其沼)라고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진관내동 428번지에는 1781년(정조 5)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금암(黔岩)에서 행한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데,

정조가 직접 글을 지었다고 한다.
숙종의 탄신일을 맞아 명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다가 창릉천의 금암발참(黔岩撥站)에서
하루 밤을 지내게 되었다.

이때 마을에서 어떤 사람이 소를 훔치다가 붙잡혔는데, 영조가 이를 안타깝게 여겨 참장(站長)에게 이르기를, “저 소도둑은 흉년을 맞아 굶주림과 추위를 견디지 못하여 죄를 저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농부에게 소가 없으면 무엇으로 농사를 짓겠는가? 참장이 비록 낮은 관직이나,
또한 직책을 맡은 것이니,

 



그대가 재량껏 처리하라.”고 하였다. 이에 참장이 소를 찾아 주인에게 돌려주고 도둑은 처벌하지 않았다. 다음날 영조가 한양에 도착하니,
이날 영조를 세제(世弟)로 책봉하였다는 것이다.

은평구 지역에는 장례 때 상여를 메고 가는 상여꾼들에 의해 불려지던 상여소리와 시신을 땅에 묻고 달구지꾼들이 흙과 회를 다질 때,

선창자가 북을 치면서 선창하면 달구질하는 사람들은 달굿대로 묘를 다지면서 후렴을 부르는
달구질소리가 전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브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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