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한국사 인물 - 무오사화 원흉 - 사봉 이극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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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한국사 인물 - 무오사화 원흉 - 사봉 이극돈

by 생각도령 2020. 8. 24.


광주 이씨로, 세조의 변덕으로 4일간 우의정을 지낸 것으로
유명한 이인손의 넷째아들.

이극돈의 할아버지는 청백리이자 참의를 지냈던 탄천 이지직, 이극돈의 증조할아버지는 광주이씨의 중흥조라 할 수 있는 둔촌 이집이다.



그의 집안은 위로 이집까지 3대, 아래로 5대를 내리 문과에 합격한 명가. 나머지 형제 넷도 고관대작이 되었고, 이극돈의 조카와사촌형제들도 모두 참판과 참의를 지냈다.
그의 광주 이씨가문은 조선 전기때 "팔극"이라 불렸을 정도로 상당한 이름을 날렸다.

좌찬성의 자리에서 연산군을 충동질해 무오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본질을 놓고 보면 상당히 억울한 인물.

심지어는 사화에 찬성했다는 이유로 간신이라는 억울한 이미지까지 덧씌워져 있다.

전례에 밝고 사장(=문장)에 능한 훈구파의 거물로서 사물을 처리하는 재간이 있었다 한다.

또한 관리의 행정을 환하게 습득했으며 옛일을 익숙하게 알고 모든 일을 자세히 생각해,

이르는 곳마다 업적이 있어 한 때 추앙되었다 한다. 정밀함이 월등하여 연산 1년에 죽은 형 이극배도 난처한 일을 만나면 이극돈에게 물었다고 한다. 성종실록의 사관들은 그가 판서
(숭정대부 겸 경상도 관찰사)의 자리에 오르자 

이극돈 정도의 인물이 그제야 이 자리에 오르다니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라고 출중한 능력에 비해 출세하지 못한다는 상반된 평가를 내렸다.

1435년 경기도 광주군에서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李仁孫)의 다섯아들중 네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고려시대 말기에 신진사대부와 교류하던 둔촌 이집 (遁村 李集)의 후손으로, 이지직(李之直)의 손자이다. 

이극배, 이극감, 이극증, 동생 이극균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5극으로 불렸으며,

조정에 진출한 종형 이극규, 과거에 급제한 사촌형제 이극기,
이극견 등과 함께 8극으로 불렸다.

금부도사로 연산군의 모후 폐비 윤씨의 사약을 들고 갔다가 멸문당한 이세좌는 이극돈의 조카였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었고, 독서를 좋아하였으며 영민하였다.

문장력을 인정받았다. 1457년(세조3) 친시문과(親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전농시주부 임명되고, 이어 성균관직강, 예문관응교, 세자시강원필선,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등을 역임하였다. 글을 잘 지어 칭찬을 들었으며, 경전과 고전의 지식이 해박하였다.

특히 명나라에 보내는 자문의 글을 잘 지었다. 1467년 사헌부 집의가 되었다. 
1468년(세조 14년) 2월 중시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였다.

2월초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외삼촌
현득리(玄得利)에게 양육되었으나 뒤에 송사를 제기한 유양춘(柳陽春)을 규탄하고,

허통을 취소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유양춘(柳陽春)은 어릴 때에 그의 어미의 아우인 현득리(玄得利)에게 붙여 양육되었으니,

은혜가 아비와 같은데도, 이에 장고(狀告)를 발하여 꾸짖고 욕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굴복함이 없었습니다.

그 아비가 양(羊)을 훔쳤다고 아들이 증언하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유양춘은 경박한 행동을 한 사람이니, 청컨대 시험에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만약 그 재주로써 시험에 나아가기를 허락한다면
장차 무엇으로 권려하고 경계를 보이겠읍니까?
또 신 등은 듣건대 한 사람을 상(賞) 주어서

천만 인(千萬人)을 권려하고,
한 사람을 벌(罰)주어서 천만 인을 두렵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유양춘과 같은 자는 심행(心行)이
불초(不肖)하니,

허통(許通)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이어 양사의 관원들과 함께, 전횡을 부리고 노비를 시켜 사람을 살해하고,

감옥에 갇힌 여죄수를 강간한 공신 
홍윤성(洪允成)의 잘못을 탄핵, 치죄할 것을 청하였다. 

3월 죄인 김석을산(金石乙山)에게 벌을 주려다가 의혹이 있자 왕명을 받고 좌찬성(左贊成)
김국광(金國光)·예조 판서(禮曹判書)
임원준(任元濬)·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조간(曹幹) 등과 함께 심문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홍윤성의 잘못이 처벌되지 않자 그는 계속해서 홍윤성의 처벌을 청하는 탄핵 상소를 올렸다.

왕은 홍윤성을 처벌하지 못했으나 이극돈을 위시한 언관들을 초청하여 그 뜻이 가상함을 위로하고 연회를 베풀어 어사주를 하사하였다


1468년 3월 한명회(韓明澮)에 의해 일본에 파견되는 통신사에 임명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귀국 후 동년 6월 통정대부 예조참의로 승진하였으며, 

1469년(예종 1년) 《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계감청 당상(繼鑑廳堂上)의 한사람이 되어 《무정보감(武定寶鑑)》을 편수하였다. 동년 4월 한성부우윤이 되어 1계급 특진과 제집사(祭執事)직을 겸직하였다.

그해 9월 다시 한성부우윤, 10월 수 사헌부 대사헌(守司憲府大司憲)이 되었다.

성종 즉위 초 부패와 전횡을 일삼는 관리들과 문제있는 신려들을 탄핵, 규찰하였다. 1470년(성종 1년)초에 자신의 형
이극배(李克培)는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고, 셋째형 이극증(李克增)은 도승지(都承旨)인 점을 들어
스스로 상피를 청하여 사퇴하였다.


바로 사헌부대사헌, 동지사(同知事)를 거쳐 왕명으로 가선 대부(嘉善大夫) 형조참판(刑曹參判)을 거쳐,

1471년(성종 2년)에는 성종의 즉위를 지지한 공로로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관에 녹훈되었고 광원군(廣原君)에 봉해졌다.

1472년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거쳐 광원군(廣原君)에 임명되었다.
그해 처당숙인 권호(權瑚)의 일에 연루되어 사헌부 장령 허적(許迪)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1473년 호조 참판을 거쳐 동년 명나라에 파견되는 성절사(聖節使)로 연경에 다녀왔고,

1474년 예조 참판(禮曹參判)이 되었다. 1476년 예조참판으로 
폐비 윤씨를 왕비로 책봉하는 책봉 주청사(奏請使)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77년 가선 대부(嘉善大夫)
광원군(廣原君), 

1478년 병조참판, 가선 대부(嘉善大夫)
광원군(廣原君)을 거쳐 1479년 다시 예조참판이 되었다.1481년 이조 참판(吏曹參判),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하고 이때 한명회, 양성지 등의 비행을 규찰하여 탄핵하였으며 이듬해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1484년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는등 여러 차례 사신으로 명에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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